대한민국 삼베 보물 | 계유(1933) 등항악기(시문 부록)
게시 시간:
2025-03-18 13:22
출처:
현재 고성(古城) 훈원(渾源)에서 잘 보존된 고민가(古民家)를 논할 때 반드시 ‘마가대원(麻家大院)’을 언급하며, 원래 집주인이었던 마석진(麻席珍) 또한 유명해졌다. 마치 거주지 때문에 사람이 이름을 알린 것처럼 보인다.
편집자주
현재 고성인 훈원에서 잘 보존된 고민가를 논할 때 반드시 '마가대원'을 언급하며, 원래 집주인이었던 마석진도 함께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치 거주지 때문에 유명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민국 시대의 마석진은 훈원의 유명한 명문가 출신으로, 전청의 거인 출신이며 복잡한 관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서성 여러 지역의 현령을 역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공익 사업에 열정을 쏟았으며, 글을 쓰고 저술 활동을 하여 고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933년 가을, 마석진은 훈원에 주둔하고 있던 방극유 여단장의 초청으로 함께 항산을 여행하고, 이 글인 『항악기』를 남겼습니다. 외지의 문인들이 항산을 여행할 때는 항산의 오랜 역사와 문화 외에도 여정 중의 의식주와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처음 경험하는 듯한 신선함을 느끼곤 합니다. 마석진은 고향 사람으로서 지역의 생활 습관에 익숙했기에 당연히 너무 익숙해서 글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로 상세한 등산 경로와 과거와 현재의 기이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것이 외지 문인들의 여행기와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이번 등산에서 방극유 여단장은 당시 매우 새로웠던 군용 망원경을 가지고 왔고, 마석진과 동행자들은 항산 정상에서 서로 망원경을 주고받으며 멀리 보이는 풍경과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마석진의 글과 부록 시는 원래 민국 시대에 간행된 책으로, 훈원 지역에 일정한 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편집자는 양지문 선생님으로부터 복사본을 받아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근대 인물들의 훈원과 항산 여행기를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으며, 이 글을 게재하여 독자 여러분께 제공하고자 합니다. 또한 마씨가 지은 『각동이적 보술』, 『항악현령』, 『항악방고』(1932년, 칠언고시)를 함께 수록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항악유기부시』마국화
계유 항악기
마석진 | 글
민국 22년
계유년 중구 전 3일, 여단장 방장후 선생님께서 항악 등산을 제안하셨습니다. 함께한 열 명은 남쪽 교외로 향했습니다.

▲『계유등항악기』01
7리에 이르러 금룡구에 도착했습니다. 동서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협곡에서는 물이 격렬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연적인 험로였고, 돌 호랑이가 문을 지키고 있으며, 웅장한 누각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목룡만을 지나니 물레방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보니 땅에서 솟아오르는 폭포처럼 물줄기가 아래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다시 3리를 더 가니,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나타났고, 서쪽으로는 용루와 봉각이 산허리에 걸려 있는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보였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절벽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로 현공사입니다. 사찰 안에는 석가모니와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소를 타고 검을 멘 신선상도 있었습니다. 사찰 북쪽에는 태백사가 있고, 태백이 직접 쓴 '장관'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돌비석은 매우 웅장했습니다. 양쪽 절벽 사이로 맑은 안개가 흐르고, 연기와 안개가 날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자기협연우'라고 불리는 풍경과 같았습니다. 과연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양쪽 기슭에는 크고 작은 인공 석굴이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돌다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무너져 있습니다. '운각홍교'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북위 도무제 천흥 원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항령 500리를 뚫기 시작한 것이 이곳이라고 합니다. 송나라 양업의 군영터는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비록 낡고 훼손되었지만, 한 사람이 막으면 많은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요충지였던 만큼 예전의 위세는 그대로였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강 동쪽에는 이목사가 있고, 강 서쪽 절벽 위에는 관제묘가 있었습니다. 산이 굽어진 절벽 꼭대기에는 나한굴이 있는데, 굴의 폭은 수 장이나 되고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기이한 흔적이 있어서 지금은 막혀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안에는 남해의 성존인 18나한을 모시고 있으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그 아래에는 달마굴이 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악록에 도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산문'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홍살문이 우뚝 솟아 있고, 높이 솟은 비석이 서 있고, 철제 사자와 돌 사자가 양쪽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문 안에는 '삼원궁'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신을 신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줄을 지어 올라가니, 바로 운로였습니다. 5리에 이르는 '정지령'은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고 조서를 맞이하던 곳입니다. 마을 앞에는 진무묘가 있는데, 성화 연간에 기록된 기우제 비석 3개가 있습니다. 사찰 밖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굽거나 늘어져 마치 무리를 이룬 것 같이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또한 용왕묘와 왕선루가 있었습니다. 산 속에는 풍부한 석탄 광산이 있었지만,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다시 수백 보를 더 오르니, 길 왼쪽 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고, 가파른 바위가 솟아 있었으며, '항종'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성화 연간 장승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대자만' 또는 '대자령'이라고 불립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종봉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고, 용루와 보개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큰 바위가 왼쪽 팔을 뻗은 것처럼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완만하게 경사지고, 동쪽으로는 험준한 봉우리가 솟아 있어 마치 바위 벽이나 성벽처럼 굽이치며 감싸고 있었고, 집게 모양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움푹 들어간 곳과 불룩한 곳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십왕전 부근은 배꼽과 같고, 다시 위로 올라가면 배와 허파와 같고, 궁전 아래는 목구멍과 심장과 같습니다. 이곳은 전체의 정신이 모이는 곳이며, 만물의 영혼이 모이는 곳입니다. 형가에서는 '태극운'이라고 하고, 도가에서는 '현관규'라고 하며, 북두칠성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곤·간의 기운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중턱에 있는 오목한 곳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뼈를 시리고, 귀를 찢는 듯했습니다. '호풍구'라고 불리는 곳으로, 바위가 옆에 서 있고, 나무로 만든 판자가 길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 바위 아래 길가에는 손바닥 자국과 발굽 자국이 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장과로가 당나귀를 타고 4대 명산을 순례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과로령'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산길을 더 오르니 산세가 완만해지고 기운이 응축되며, 땅이 다소 넓어지면서 사찰들이 높고 낮고 좌우로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종과 징, 목어 소리가 맑고 깊게 들려오고, 보이는 것은 여러 층의 누각들이 숲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은 맑고 기분은 상쾌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경지, 혹은 도원경이 아닌가 싶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번잡한 세상은 순식간에 구름과 흙의 차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이곳 사찰 중 적당한 규모의 곳으로는 십왕전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백령관’이었다. 그 안에는 도사 이청건의 초상화가 있다. 이청건은 섬서성 용교 출신으로, 옹정 12년에 이곳에 와서 수행하다가 자미각을 짓고자 기초 공사를 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사용하려 하였으나, 누군가의 무고를 당해 욕을 먹고 떠나려 하였다. 그러나 읍의 사람들인 진전 등이 그를 붙잡아 3년 동안 황제를 위한 경전을 낭송하겠다고 서원하고, 그 공덕을 이룬 후 자리에 앉아 돌아가셨다. 그의 초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데, 얼굴은 항상 새것처럼 깨끗하고 티끌 하나 없어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기며 존경하여 ‘둔목도’라고 불렀다. 궁궐 뒤 높은 언덕에는 ‘삼모굴’이 있는데, 바로 모영, 모고, 모충 세 형제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안뜰에는 자미각이 있고, 동쪽에는 ‘접관청’이 있는데, 원래 이름은 ‘백운당’이다. 백운당 동쪽에는 ‘현무정’ 즉, ‘리일천’이 있는데,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면 매우 잘 들어주는 곳이다. 흔히 불볕더위에 하늘이 타오를 듯할 때,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단비가 따라 내려 널리 내린다. 특히 놀라운 것은, 사찰 축제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 마셔도 고갈되지 않지만, 만약 누군가가 불경스럽게 행동하면 샘물이 바로 마르고, 참회하고 기도해야 다시 나온다. 그 우물은 겨우 3척 크기의 돌로 된 작은 구덩이일 뿐이다. 우물 왼쪽에는 홍무 13년에 사찰을 수리한 기록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운중의 용호 장군이자 도지휘사인 왕약이 운중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흉작이 들자 기도하여 영험한 결과를 얻고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순임금 때부터, 돌이 동쪽으로 옮겨지고, 곡양에 사당이 세워졌다. 위나라가 운중에 도읍을 정하고 원악궁관을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당나라 개원 연간에 왕의 작위를 받았고, 현종이 친히 임하고, 사원 이름을 용천관이라 하였다. 송나라 상부 연간에 안천원성제로 봉해졌다. 요나라와 금나라 때에는 건물을 계속 새롭게 만들었으나, 후에 오래되어 수리하지 않아 궁궐이 무너졌으므로, 이에 사람을 고용하여 수리를 하고 신의 은혜에 감사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운중주 일을 처리하는 정윤선이 글을 썼다
여기서 각 사찰로 향하여 갑, 을, 병 세 갈래 길로 나뉘어 자세히 설명하겠다.
▲《계유등항악기》02
갑 접관청에서 동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대왕묘가 있고, 다시 궁전으로 간다.
궁궐 왼쪽에는 ‘환원동’이 있는데, 깊이를 알 수 없고 예전에는 돌로 문을 막았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순찰어사 황응곤이 이를 열고 ‘복환천교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록비를 세웠다. 또 비문에는 ‘요컨대 건곤에 창조를 돌려주고, 자오에 떠돌이 생활을 결정해야 한다’라고 적혀있다. 궁궐 오른쪽 바위 아래에는 ‘비석굴’이 있는데, 풍문에 순임금이 북악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바라보자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 형태를 살펴보니 전설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남겨두기 위해 기록해 둔다. 다시 오른쪽으로 가면 후토부인묘가 있고, 그 묘 오른쪽 바위에는 명나라 왕유의 시 세 수가 새겨져 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대모 위존 奠朔방, 순방전제 謁현황.
행래가기 逢조애, 반도절전 부석양.
취설정중 목의로, 자지곡리 수정향.
승유지차 금기상, 령략연하 진일장.
단애삭출 수부용, 암학창창 취롱중.
례관관전 비석굴, 등정정상 입천봉.
송두망영 의반학, 동구청천 파요룡.
령혈백운 부만곡, 일시탄토 만산봉.
항봉준극 여천기, 북극천추 남극저.
관세은하 의지척, 수마성두 박운제.
단암일영 홍하찬, 송취천련 벽락미.
북악운중 천하척, 의희대면 각운니.
궁전 왼쪽에는 ‘화장루’가 있는데, 건물은 용이 날갯짓하는 모습 같고, 처마 끝은 기왓장이 겹쳐 쌓인 듯하며, 험준한 산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꺾여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고, 협곡은 깊고 그윽하며, 백운령혈은 절벽 오른쪽에 매달려 있고, 그 옆 바위에는 ‘백운령혈’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가 올 때면, 안개가 자욱하게 골짜기를 채운다. 궁궐 옆 바위에는 큰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운중승적 령궁현응 동문춘효
고금승개 불재인간 준극우천
백운령혈 로접천구 일덕봉
복환천교 환원동 공극부교
천암경수 만학쟁류 비석유적
다시 산에 오를 때, 제목 없는 시 한 수를 적어 둔다.
자축장성 덕편참, 화이일통 경공담.
관래력수 천무이, 문도현량 책시삼.
악위련호 항배북, 조유사한 안상남.
룡황준우 구진적, 필마추풍 루불감.
록천
대왕묘에서 남쪽으로 가서 염도사를 지나 다시 남쪽으로 가면 석양령, 득일암이 있는데, 바로 위나라 도사가 승화한 곳이다. 도사의 이름은 청천이고, 호는 득일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명나라 신종 때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신선의 책을 깨달았고, 손으로 그림을 그려 대신 경전을 낭송했으며, 옷은 무릎 부분이 여러 번 헤어져 있었고, 뿌리와 껍질, 보리와 조를 먹고도 배고픔을 함께 나누었다. 암자에서 수십 년 살면서 300보 이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고, 강희 연간에도 살아 있었으나, 후에 자리에 앉아 돌아가셨다. 길이 험하여 기어서 가야 했고, 다시 남쪽으로 가면 ‘사신애’가 있다. 석양령은 서쪽 벽면에 서 있고, 홀로 우뚝 솟은 병풍 같으며, 해가 바다에 지면 연기와 안개가 마치 비단 그림과 같이 절벽의 이끼와 바위 무늬에 드리워져 있어서 수놓은 그림 같다고 한다. 회선부에 있다고 잘못 알려진 곳이 있다. 자하동은 궁전 왼쪽에 있고 석양령과 가까운데, 자하원군사가 있어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지금은 무너졌지만, 문 밖의 폭포는 마치 하얀 비단과 같다.

▲《계유등항악기》03
을(乙)은 접관청(接官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가면 바로 "순양궁(純陽宮)"인데, 이곳은 여조(呂祖)가 신령의 뜻을 받들어 나타난 곳이다. 여기서 다시 두 갈래 길로 나뉜다.
(1) 북서쪽으로 가면 태을묘(太乙廟), 대비각(大悲閣), 릉운각(凌雲閣), 구천궁(九天宮)이 있다.
방여장(方旅長)이 현판에 "벽하궁(碧霞宮)"이라고 썼는데, 속칭으로는 낭낭묘(娘娘廟)라고 한다. 궁궐 안의 전각과 뜰은 깨끗하고, 도사와 관광객들이 많이 머문다. 동쪽으로는 백운(白雲), 자하(紫霞) 등의 명승지가 마치 환영하는 듯하다. 도사 유일운(劉一雲)은 섬서(陝西) 수덕주(綏德州) 사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았는데, 강직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궁궐 건물의 낡고 허물어진 것을 한탄하며, 연(燕)과 진(晉) 지방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아 천금을 얻어 돌아와 수리하고 개조하였다. 그는 이곳에 50년 넘게 살면서 항상 악묘(岳廟)가 새롭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건륭(乾隆) 30년에 지주(知州) 계경순(桂敬順)이 칙령을 받들어 악묘를 수리하자, 유일운은 매우 기뻐했고, 8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유일운도 죽었다. 계경순은 그가 악묘에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글을 지었다. 서쪽으로는 취설정(翠雪亭)의 폐허가 있고, 그 아래에는 바로 망선정(望仙亭)이 있는데, 정자 오른쪽에는 항수(恒水)가 흐른다. 여름 초에 남쪽을 바라보면 경치가 아름답다.
구천궁 뒤에는 "사대부송(四大夫松)"이 있는데, 봉황과 학이 종종 그 위에 모인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창신묘(瘡神廟), 산신묘(山神廟)가 있고, 다시 내려가면 선인분(仙人墳)이 있다. 민국(民國) 3년 7월 3일 악묘를 수리하고, 회선부(會仙府) 상량식을 거행했는데, 밤에 감독관 안보원(安保元) 등이 갑자기 선인분에 등불 세 개가 빙빙 돌면서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수많은 등불로 변하여 산골짜기를 비추는 모습이 그림과 같았다. 평소에도 이런 종류의 등불이 자주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신등(神燈)"이라고 부르며, 반딧불이나 인광(燐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이러한 등불은 사천(四川)의 청성산(青城山), 아미산(峨眉山)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산의 신령이 기이한 현상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2) 구천궁에서 북서쪽으로 가서 산등성이에 있는 움푹 들어간 곳에 "규성각(魁星閣)"이 있다.
도시를 내려다보면, 마치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북쪽으로 내려가면 항배(恒背)인데, 성으로 오가는 지름길로 10리 정도를 줄일 수 있지만, 가파르고 좁아서 다니기가 좋지 않다.

▲《계유등항악기(癸酉登恒岳記)》04
병(丙) 순양궁에서 약간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문창묘(文昌廟), 관제묘(關帝廟), 천관묘(天官廟)가 있고, 다시 올라가면 노룡왕묘(老龍王廟), 이랑묘(二郎廟)가 있다. 북동쪽으로는 상자지곡(上紫芝峪), 석지도파(石脂圖坡), 잔운강(棧雲崗) 등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데, 명승지가 있다.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올라가면 숭령문(崇靈門)이 있는데, 문 안 왼쪽에는 청룡전(靑龍殿), 오른쪽에는 백호전(白虎殿)이 있고, 가운데 계단으로 북쪽으로 98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수백 년 된 측백나무와 회나무가 양쪽에 늘어서 있는데, 사계절 푸르고 시들지 않으며, 마치 시중드는 것처럼 양쪽에 똑바로 서 있다. 계단 위에는 남천문(南天門)이 있고, 문 안에는 조전(朝殿)이 있는데, 좌향(坐坎向離)이고, 현판에는 "정원지전(貞元之殿)"이라고 쓰여 있으며, 옛날에는 "현령궁(玄靈宮)"이라고 불렀다. 왼쪽에는 갈아입는 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경루(藏經樓)가 있다. 명(明) 신종(神宗) 만력(萬曆) 24년에 칙령으로 도장경(道藏經)을 명산(名山)의 궁궐과 사찰에 내려주었는데, 어마감(御馬監) 백충(白忠)이 가져와서 안치하였고, 모두 1479종, 512함으로 16종류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부수(部首) 신부(神符) 옥결(玉訣) 영도(靈圖)
보록(譜錄) 계율(誡律) 위의(威儀) 방법(方法)
중술(衆術) 기전(記傳) 찬송(讚頌) 표주(表奏)
본문(本文) 태현(太玄) 태평(太平) 태청(太清)
칙론(勅論):
항산(恒山) 북악묘(北岳廟) 주지 도사에게, 짐은 정성을 다해 대장경을 인쇄하여, 경성(京城)과 천하의 궁궐과 사찰에 내려주니, 경서의 첫머리에 있는 칙서에 이미 그 내용을 알렸다. 너 주지와 도중(道衆)은 반드시 정결하게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낭독하여, 몸의 건강과 평안을 지키고, 궁궐과 집이 깨끗하게 하고, 지난 잘못을 참회하며, 무한한 수명과 복을 빌고, 백성이 평안하고 나라가 태평하며, 천하가 태평하여, 사해팔방(四海八方)이 모두 청정에 돌아가도록 하여, 짐이 공경하고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이루도록 하라. 이제 특별히 도경창(道經廠) 부장단 어마감 소경감(少卿監) 백충을 보내어 거기에 안치하도록 하니, 각각 알고 따르도록 하라. 흠재(欽哉) 고유(故諭).
원칙(原勅) 한 축은 아직 조전에 남아 있고, 장경은 명말(明末)에 48함이 없어졌고, 건륭 11년에 구천궁 도사 유일운이 경사(京師) 백운관(白雲觀)에서 일꾼을 모아 베껴 채웠다. 민국 이후로 많이 없어져서 다시 백운관에서 공경히 청하였다.
북악안천원성제보장제묘(北岳安天元聖帝寶藏諸廟), 즉 지금의 항인(恒印)이다. 또한 고화(古畫) 네 폭이 있는데, 길이가 한 장(丈) 정도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신상을 그렸는데, 필력이 힘차고 정신이 넘치는, 진정한 신선의 그림이다.
이곳의 형세는, 뒤에는 마운봉일(磨雲捧日)의 험준한 바위에 기대고, 앞에는 만학조종(萬壑朝宗)의 겹겹이 쌓인 봉우리를 마주하고, 왼쪽에는 흥운치우(興雲致雨)의 용사(龍砂)가 감싸고, 오른쪽에는 장소생풍(長嘯生風)의 석호(石虎)가 엎드려 있다. 때로는 솔바람 소리가 들려 마치 보타(普陀)의 바다 소리 같고, 때로는 학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왕모(王母)가 호위하는 모습 같다. 만학천암(萬壑千巖)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삼변구새(三邊九塞)가 모두 신령스럽다. 푸른 소나무와 늙은 잣나무는 용과 뱀으로 변하고, 요초기화(瑤草琪花)는 서로 경쟁하며 상서로운 기운을 보낸다. 이것은 마치 극(極)을 받드는 때에 백령(百靈)이 효명(效命)하는 것이 아닌가? 전각은 높이가 수척(數仞)이고, 웅장하고 위대하며, 금빛으로 빛나고, 단청(丹楹)이 새겨져 있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글씨를 보면 소왕(蘇王), 안(顔), 유(柳)의 글씨가 눈에 차지 않고, 비석을 읽으면 예서(隸篆), 초서(草書), 진서(眞書)가 눈에 가득 차 있다. 불경 소리가 들리고, 진경(眞經)을 낭독하고, 신선의 음악이 감돌고, 피리와 퉁소를 분다. 그곳에 서서 살피면, 마음이 감격하고, 반드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면,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진실인가 환상인가,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악진형도(五岳眞形圖)에 따르면, 북악신(北岳神)은 금선씨(金蟬氏)의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이름은 신악(晨顎)이고, 동연무극진군(洞淵無極眞君)이며, 송(宋)나라에서 안천원성제(安天元聖帝)로 봉해졌고, 명(明)나라에서 북악항산(北岳恒山)의 신으로 바뀌었는데, 세상의 토지, 산천, 소와 양 등의 가축을 관장한다. 또한 창용(昌容), 장과(張果), 모영(茅盈), 이교(李交), 관혁(管革) 등의 신선들이 종종 모여, 역대 왕조를 도와 악을 물리치고, 그 뜻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다. 복을 빌고 재앙을 막으면 반드시 응답하고, 그 지역에는 재앙이 없고, 풍년이 들며, 신령의 응답이 이와 같다. 그래서 멀리서나 가까이서 산에 와서 절을 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울 정도이다.

▲《계유등항악기(癸酉登恒岳記)》05
참배를 마치고 궁궐 서쪽 문을 나서니, 도사가 말했다. "이곳은 금계가 울어 새벽을 알리는 곳입니다." 계단 돌을 치니 "구구" 소리가 나고, 모든 산에 메아리가 울렸다. 내가 말했다. "이것은 메아리입니다." 서쪽으로 가서 오토사(五土廟)에 이르러 어필비(御碑亭)를 보았다. 건륭제가 쓴 "화수유구(化垂悠久)" 네 글자가 여덟 팔각정(八角亭)에 보호되어 있었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옥황각(玉皇閣)과 회선부(會仙府)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넓고 고요하며 봄가을의 경치가 특히 아름다웠다. 그곳에 서니 마치 무릉원에 들어가 유천(劉晨)과 원조(阮肇)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부(府) 북쪽 바위 위에는 집선동(集仙洞) 옛터가 있는데, 현재는 "대선동(大仙洞)"이라 하며, 동서 바위 사이 수백 보에 걸쳐 많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이끼를 긁어내어 찾아보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을 아래에 적는다:
만仞 절벽, 사악과 이름을 같이 하다, 구름 병풍 푸르게 솟아있다
남천에 대한 경치, 구름 속의 뛰어난 경치, 천지 대관
푸르름 항상 새롭다, 구름 산 푸르게 솟아있다, 하늘을 우러르며 성스러움을 숭배하다
만목 음침, 남쪽에서 만국을 우러르다, 산하 통일
물외 선도, 천하 명산, 땅을 통일하고 하늘에 통하다
곤륜의 첫 번째 지맥, 복지 동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금기대(琴棋臺)가 있는데, 땅은 활보다 작고 돌은 숫돌처럼 평평하여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한 사람이 구경할 수 있으며, 가운데에는 네모난 칸이 새겨져 있어 바둑을 둘 수 있다. 달빛이 밝고 바람이 맑은 밤에는 나무꾼과 목동이 "딩딩"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왕자란커(王子爛柯)와 종자이정(鐘子移情)의 이야기가 생각나며, 그 신비로운 경치는 흉내낼 수 없다. 이곳 바위 꼭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북두칠성 아래 기둥 하나, 도를 깨달은 흔적, 신선의 산 기이한 현상
바위 절벽 하늘을 찌르다, 한 판의 란커, 금기대
등의 글씨가 있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통현곡(通玄谷)에 이르니, 장과로(張果老)가 단약을 써서 도를 닦은 곳이다. 장과로는 당나라 개원 연간에 "통현선생(通玄先生)"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므로 골짜기에 그 이름을 붙였다. 옛날에는 돌문이 있었고, 연기와 구름이 어울리고 낡고 황량하며, 깊고 어둡고 음산하여, 아직도 약탕기와 풀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골짜기 입구 위에는 "과로선종(果老仙蹤)"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남쪽으로 500보 내려가면 구천궁(九天宮)에 이르는데, 골짜기를 따라 회선부(會仙府) 북쪽으로 올라가 덩굴을 잡고 바위를 타고 올라가 구불구불하게 꼭대기에 이른다. 꼭대기는 지상에서 3000여 자 높이에 있으며 구름 위로 솟아 있으니, 정말 별을 잡고 북두칠성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의 힘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이다. 바위 모양이 많고 색깔은 노랗다. 키 작은 소나무가 어지럽게 늘어서 있으며, 넓은 꼭대기는 헐벗었는데, 마치 우산과 같고 뱀과 같다. 푸른 뿌리가 엉켜 얽혀 있고 끊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으며, 무성하지도 않고 가리지도 않고, 바람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파도 소리가 귀에 들리는데, 이것을 "악정송풍(岳頂松風)"이라 한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정화하고, 원기를 북돋우며, 마침 날씨가 맑고 푸르며, 아득하게 펼쳐진 광경 속에서 오대(五臺), 삼관(三關), 구채(九寨) 등의 명승들을 손짓 하나로 가리킬 수 있고, 금성의 탑, 상간의 강은 마치 송곳과 실처럼 보이며, 만리장성은 어둡고 쓸쓸하며 슬픔이 있는 듯 보이고, 산해관(山海關)은 엄숙하고 엄격하며, 슬프고 장엄한 듯 보이며, 자징(紫荊), 비호(飛狐), 도마(倒馬), 거용(居庸)은 마치 성벽과 경비병 같으며, 내려다보는 순간 감회에 젖는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많은 산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느끼고, 천지는 마치 물거품 같으며, 浩然之氣가 우주에 가득 차고, 원신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계유등항악기(癸酉登恒岳記)》06
망원경으로 사방을 바라보니, 어떤 이는 "치성의 거북이가 알에서 나와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봉황산의 그림자가 날갯짓을 하려는 것 같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북악산 봉우리에서 중구절을 맞이하여 천풍이 황주를 흔들었다"라는 노래를 부르니, 나도 말했다.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지를 알 수 없다. 이제부터 인생은 더욱 높이 서고자 하고, 눈을 더 넓게 뜨고자 하고, 뜻을 더욱 멀리 두고자 하고, 생각을 더욱 초월하고자 하며,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산에 오르며 깨달았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서로 따라 동쪽 바위 움푹 들어간 곳에 이르니, 옥양(玉羊) 떼가 보이며, 어떤 것은 자고 어떤 것은 일어서는데, 마치 평원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 석지(石脂)의 비탈에는 점점이 별이 박혀 있는 듯 보이는데, 마치 태고 시대 개구리 알처럼 보였다. 잔운강(棧雲崗)에는 돌뼈가 빽빽하게 서 있는데, 마치 봄 대나무가 땅에서 나오는 것 같고, 마치 칼산과 검나무와 같아 놀라서 가까이 갈 수 없다. 그 옆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데, 마치 쑥을 쪄서 기장을 삶는 것 같으며, 바위 틈에서 나와 바위 표면에 닿으니,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릴 것 같았다.
어떤 이는 말했다. "이곳이 자지곡(紫芝峪)이고, 저곳이 백운혈(白雲穴)이다." 절벽은 위험하고 길은 험하여 오르기가 쉽지 않아, "몸으로는 가지 않고 정신으로 가고, 형상을 구하지 않고 마음으로 구하며, 눈으로 발을 대신하고, 손가락으로 서로 대답한다"라고 약속했다. 어떤 이는 말했다. "옛날 연나라 임금이 큰 나무 뿌리 아래서 구슬과 옥을 70여 개씩 얻었다는데, 그 나무는 어디 있을까?" 어떤 이는 또 말했다. "명나라 가정 35년에 검은 버섯 12개를 진상했는데, 지금도 남아 있을까?" 어떤 이는 또 말했다. "무리 지어 다니는 뱀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문을 지키는 풀은 손가락보다 낫다. 모두 이 산의 특산물인데, 우리가 어찌 용감하게 하나하나 그 실체를 탐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아, 해가 이미 기울었고, 발은 이미 피곤하고, 밥은 이미 익었으니, 깊은 곳을 탐구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하늘 아래 일은 즐거움을 지나치게 하면 복이 남지 않으니, 어찌 다 할 수 있겠는가?" 모두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더듬어 돌아갔다.
갈아입는 방에 이르니, 등이 이미 켜져 있었다.

▲《계유등항악기(癸酉登恒岳記)》07
밥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검은 용이 궁궐 뒤쪽 바위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뜻은 마치 "여러분이 산에 와서 나와 함께 어울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보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만민이 머리를 조아리며 축원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바람이 사방에 가득하고 세상은 너무나 더럽습니다. 신이 구름 속에서 내려와 비를 내리시어, 온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내시어,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을 위로하시옵소서!"라고 하였는데,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따라가 찾아보니, 절벽 중간에 나무로 만든 용이 바람에 흔들리고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고개를 끄덕이며 암묵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아, 나는 알겠다. 어제 밤에 나와 어울린 것은 바로 너였구나!" 모두들 놀라서 깨닫고 서로 웃었다. 천하태평, 이것이 그 조짐이다.
여행 대장이 말했다. "어찌 기록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붓을 들어 간략하게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유산 주객 방극유 여행 대장 약력
방극유(1893—1981), 자는 장후(莊侯), 또는 장후(壯侯)로도 불리며, 안휘성 잠산 사람으로, 국민혁명군 육군 중장이었다. 보정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난서변방군 소대장, 중대장, 참모 등을 역임했으며, 1926년에는 국민군 제3군 제1사단 사령부 참모장 겸 교도단 단장, 제3군 제2여단 사령부 참모장, 제21사단 제23여단 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28년 10월 이후에는 100여단 여단장, 제16사단 사단장, 제206여단 여단장 등을 역임했고,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소속 여단을 이끌고 격렬했던 흔구회전 등에 참전했으며, 제19군 독립 제2여단 여단장, 제19군 부군장, 제5전구 사령관부 군무처 처장, 군위회 훈련부 제5독훈처 처장, 한중행영 군무처 처장 등을 역임했다. 항전 승리 후에는 북경행원 제1처 처장, 국방부 중장부원을 역임했다. 1949년 봄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완 총통부 중장 참군을 역임했고, 1952년 10월 예편했으며, 1981년 8월 26일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1933년 전후로 진서군 방극유 부대는 혼원에 주둔했는데, 여단장 방극유는 한가한 시간에 마국화, 조국량 등 많은 혼원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며 사교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방극유는 상당한 문화적 교양을 갖춘 유명한 장군으로, 마국화와 함께 항산을 여행하기도 했고, 조국량에게서 궁궐의 옛 이야기를 배우고 서예를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혼원을 떠난 후에도 조국량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뛰어난 서예 실력을 칭찬했다.
방극유는 1919년 봄 보정군관학교 6기 포병과 2중대를 졸업했고, 1936년 2월 3일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0년 4월 육군대학 특별반 4기를 졸업했다. 육군 중장 임명일은 불명이다.

《보정육군군관학교 동학록》 ↕ 방극유
포병과 6기 2중대
이름: 방극유
자: 장후(莊侯)
나이: 스물여섯
출신지: 안휘 태호
연락처: 잠산 황니항 방동창 전달
보술각동이적(補述各洞異蹟)
마석진 |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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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동(羅漢洞) 자기협곡 현공사 남쪽, 하서산 굽은 절벽 꼭대기에 있다. 안쪽 동굴 입구는 현재 막혀 있으며, 동굴 입구 바깥의 텅 빈 큰 구멍만 남아 있는데, 넓이는 수 장(丈)이고 깊이는 절반 정도이며, 원래 모습을 이용하여 불전을 만들었고, 불전 안 북동쪽에는 원래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광서 어느 해에 주지승이 야반에 절 안에서 “슈슈”하는 숨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엿보니 소처럼 생긴 짙은 붉은색의 털이 광채를 발하는 것이 동굴 앞 살구나무에서 몸을 비비다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살펴보니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곧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동굴 입구를 막았다고 한다.
또한 옛 사람들이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가장의 당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일꾼이 매우 부지런했고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주소를 물어보니 매번 말이 달랐다고 한다. 당씨는 의심하여 그의 아들에게 어느 밤 그를 따라가게 했는데, 나한동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갔고, 아들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 더듬더듬 나아가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고, 오랫동안 걸어가다가 멀리서 빛을 보았는데, 일꾼은 갑자기 땅에 쓰러져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순식간에 궁궐이 나타났고, 다른 세상이 있었는데, 청아하고 빼어났다고 한다. 아들은 놀라 울음을 터뜨렸고, 이윽고 누군가가 그를 인도하여 나왔다고 한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이미 여러 날 동안 그를 찾고 있었는데, 그의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는 가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그 후 일꾼도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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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동(還元洞) 악묘(岳廟)와 침궁(寢宮) 왼쪽에 있는데, 명나라 이전에는 동굴 입구가 막혀 있었는데, 순안어사 황응곤이 산에 제사를 지내면서 열었고, 동굴 바깥에는 기사비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굴 안은 수백 리 밖으로 깊이 통하며, 우혈(禹穴)에 통할 수 있고, 어떤 동천(洞天)과 지하로 왕래할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함께 동굴 안을 탐험하려고 횃불과 식량을 가지고 며칠 동안 가다가 강에 막혀 돌아왔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지는 최근에는 감히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큰 명산에는 모두 동천복지(洞天福地)가 있으며, 동정림옥(洞庭林屋)과 같은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흠수(沁水)를 맡았는데, 소속 상우촌에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옛 동굴이 있으며, 그 안에는 돌로 만들어진 그림과 같은 것이 있어 매우 신기하다고 한다. 또한 호관현에도 매우 크고 깊은 동굴이 있다고 《동산당일기》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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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진동(總眞洞) 지기에 따르면 대무산 총진동은 신봉 남서쪽 20리 약간 못 미치는 곳의 꼭대기 절벽 아래에 있는데, “총진”이라는 동굴이 있으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룡동(金龍洞)”이라고 하며 매우 깊고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또는 소나무 잣대를 가지고 수십 리를 가면 강이 있는데, 사람들은 감히 건너지 못하고, 《어야(爾雅)》에서 말하는 “항산에 태원보천(太元寶泉)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가뭄에 기도하면 효험이 있고, 우연히 욕되게 하면 동굴의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고, 바람과 천둥이 크게 일어나며, 기도하면 그만둔다. 송나라의 설안抚는 세 번 기도하여 두 번 효험을 보았고, 표봉리택후(表封利澤候)로 책봉되고 명혜공(明惠公)으로 책봉되었는데, 본조(本朝)에 이르러 바뀌지 않았다. 지금 임금은 금룡을 이용하여 부호를 써서 동굴 안에 던지고, 나무를 베고 채취하는 것을 금하고, 동굴 입구를 막아 출입을 끊었고, 두사(杜師)가 전각을 수리하고 악안상(岳安常)이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지서에 나와 있는데,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옥천용산 사이에 있는데, 여유가 있으면 방문해야겠다.

▲《보술각동이적(補述各洞異蹟)》 편두에 앞 그림이 보임
항악현령(恒岳顯靈)
마석진 | 글
평소 재해를 막고 비를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고, 큰 재앙을 만나도 종종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과거의 일은 논하지 않겠지만, 예를 들어 민국 15년 병인년 4월 19일에 국민군이 연북 13개 현을 매우 급하게 포위했고, 혼원도 포위된 도시 안에 갇혔고, 포화가 하늘을 찌르며, 14일부터 5월 2일 밤까지 유창재는 걱정되는 도시에서 혼자 누워 있다가, 꿈에서 일자 진인이 강림하는 것을 깨달았고, 유창재가 구원을 청하자 진인이 숨겨진 뜻을 담은 네 구절의 글을 써서 주었는데, “뭇 선녀가 연민하여 천대에서 내려왔네, 큰 재앙을 작은 재앙으로 바꾸리라. 성을 닫은 것이 19일이라 말하지 말라, 99의 숫자는 이미 배치되었네.”라고 썼다. 글을 쓰고 나서 도가를 논하며, “수공(水公)의 도검, 상제(上帝)의 벌, 종자를 고르고 좋은 것을 남기며, 인연이 있는 자는 구원받고, 천리(天理)와 양심(良心), 인과응보(因果應報), 큰 선행과 큰 덕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뭇 선녀가 선악을 가리고, 공과를 검사하며, 총알과 함께 잠든다” 등의 말이 있었다. 성이 해제되는 7월 8일까지는 아직 멀었고,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이 온 현에 퍼졌고, 사전에는 모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7월 8일 군대가 물러가고 포위가 풀리자, 사람들은 99의 숫자가 81일 동안의 포위 기간에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했으며, 전혀 틀리지 않았다. 큰 재앙이 작은 재앙으로 바뀌고, 신의 힘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며, 그 신령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또 기록에 따르면, 항악 사자(恒岳使者)가 양홍유(楊洪裕)에게 돌로 만든 기러기 두 마리를 주었는데, 태조의 숙비(淑妃)와 태위(太尉) 정장(廷璋)과의 다른 점이 드러났다. 거란의 주인 굴렬(屈烈)과 가돌간(可突干)이 반역을 모의했는데, 항악신(恒岳神)이 나타나 순(順)을 도와 반역을 토벌하여 곧바로 잡았다. 또 명나라 성화(成化), 가정(嘉靖) 연간에는 서쪽 오랑캐와 광산 도적의 난리가 있었는데, 모두 항악사(恒岳廟)에 기도하여 공을 세웠다. 그 외의 기이한 일들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항악현령(恒岳顯靈)》 편두는 앞 그림에 나옴
항악 고적 답사
마석진 | 글
임신년(壬申年)(1932) 맹하(孟夏)
황제가 주를 나누어 오악을 정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니 얼마나 훌륭한가,
숭산, 형산, 태산, 화산이 각각 분봉되었지만, 오직 대모산(大茂山)만이 존귀한 방삭(方朔)(항산, 일명 대모산)이다.
기운은 육일(六一)과 우레와 바람을 겸하고, 아래로는 감정(坎精)을 품고 위로는 비수(畢宿)를 향한다.
신도의 수도를 호위하고 북문을 굳게 지켜, 재앙을 막고 환난을 막아 백성이 평화롭다.
때로는 기도하면 단비를 내리고, 때로는 기이한 능력을 보여 말의 병을 없앤다.
옛날 표정(表正)이 진신(辰樞)을 세우고, 우제(虞帝)가 겨울에 순행하여 제사를 지냈다.
어찌 돌이 날아다닌다는 허황된 말이 있겠는가, 곡양(曲陽)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 보물을 잃었다.
후에 청나라 신하 전본성(粘本盛)이 제사 의식을 정비하여 청원했다.
방위와 위치를 혼원(渾源)으로 정하고, 이로써 밝은 제사가 바로잡혔다.
매년 맹하(孟夏) 초팔(初八)부터, 천 리나 되는 거리에서 산에 올라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내가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깊이 존경하며, 성 밖 남쪽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서 있다.
길은 금룡구(金龍口)로 들어가 뻗어 나가고, 푸른 병풍 같은 절벽이 칼문(劍門)을 연상시킨다.
북두칠성은 동서로 문광(文光)을 쏘고, 돌 호랑이는 문을 지키며 험악하게 노려본다.
운참(雲棧)은 무너졌지만 석굴(石窟)은 남아 있고, 옛날에는 국경 방어가 엄격한 요새였다.
길가에는 물레방아가 있고, 시냇물은 산을 뚫고 산과 물이 함께 흐른다.
위를 보니 신기루가 허공에 걸려 있고, 산허리에 반, 구름 속에 반 걸쳐 있다.
도끼와 정(丁)으로 만든 기묘한 구조는, 반드시 수반(輸班)이 남긴 뛰어난 기술일 것이다.
장관을 이루는 태백사(太白祠)의 새겨진 돌, 나한동(羅漢洞) 앞에는 연기와 구름이 자줏빛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벽을 마주하고 앉았던 곳, 이목(李牧)이 국경을 순찰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구름 누각과 무지개 다리가 구불구불 이어져 오르고, 구불구불한 계곡이 십 리나 된다.
한참 후에 아래로 내려와 악록(岳麓)에 도착하고, 삼원궁(三元宮)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봉우리 높이는 삼천구백칠십 자(丈)이고, 아득하고 망망하며, 험준하고 웅장하다.
구름 길을 처음 오르니 걸음걸음 높아지고, 정지령(停旨嶺) 앞에서 신선의 자취를 묻는다.
망선루(望仙樓), 비선조(飛仙鳥), 나는 신선을 만나 영원히 아침저녁으로 함께하고 싶다.
호구(虎口)의 바람은 기세가 넘치고, 용이 굴에서 나와 구름이 바위에 부딪힌다.
마치 유환(劉阮)이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간 것 같고, 또 중화(重華)가 큰 늪에 빠진 것 같다.
항종(恒宗)의 큰 글씨는 자(丈) 여덟 자가 넘고, 자하동(紫霞洞) 앞에는 구름 봉우리가 푸르다.
과로(果老)는 당나귀를 타고 사병(四兵)을 거느리고, 산 밑을 짓밟고 피의 자취를 남겼다.
염도(閻道)가 신선이 되어 근본을 묻고, 득일암(得一庵) 앞에 굴집이 있다.
하늘의 기묘한 조화로 동굴은 깊고 어둡고, 위로는 침궁(寢宮)이 있고 신선과 인간이 갈라진다.
호봉(虎峰)은 위풍당당하게 높은 언덕에 누워 있고, 호불신(胡不身)이 그 기운을 빼앗았다.
푸른 소나무와 늙은 잣나무는 용과 뱀으로 변하고,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 비늘을 거스른다.
더욱이 매달린 뿌리가 서로 이어진 나무가 있고, 장과(張果)가 당나귀를 매어 놓았던 곳이다.
자미각(紫微閣)은 별자리를 비추고, 삼모굴(三茅窟)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비황(飛鸞)이 나타나 려순양(呂純陽)을 보이고, 대왕(大王)의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내린다.(여조, 대왕 등의 사당)
이곳 구름과 산이 아득한 사이에, 항상 신선이 만나 담소한다.
이곳 산골짜기는 잠시 넓어지고, 백운당(白雲堂) 앞에는 구름이 보호한다.(현재 접관정(接官亭))
당 옆의 영천(靈泉)은 쓴맛과 단맛이 나뉘고(현무정(玄武井)), 비를 빌면 반드시 응답한다.
네모난 연못을 파니 땅에서 샘이 솟아나고, 샘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때로는 신을 모독하면 천신이 노하고, 반드시 참회하는 마음으로 향을 피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굴에서 바람이 울부짖고 사고가 많다.
석양령(夕陽嶺) 아래서 저녁놀을 바라보니, 다섯 가지 색깔이 아름다운 석양이 기울어 간다.
위를 바라보니 둥근 구름이 구멍에서 나오고, 청룡과 백호가 서로 날아오른다.
신룡이 비를 내리고 천둥 수레를 밀고, 정갑(丁甲)과 태을(太乙)이 채운(彩雲)을 걷는다.(청룡, 백호, 용왕, 태을 등의 사찰)
이곳에 이르러 모든 산들이 복종하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벌레와 모래처럼 보인다.
계단을 오르며 옷을 갈아입으니 피곤함을 잊고, 정성을 다해 정원전(貞元殿)에 절한다.
린궁(琳宮)과 보찰(寶刹)이 청허(清虛)하게 세워지고, 만 개의 맥이 모두 북쪽을 향한다.
이기(二氣)가 조화되어 해와 땅이 맑고, 구름과 연기가 붉은 현(縣)을 가리지 않는다.
이때 호흡이 임금의 처소에 통하고, 기운은 장홍(長虹)처럼 눈은 번개처럼 날카롭다.
홀연히 세상 밖에 있어 마음과 정신이 맑고, 세상의 시끄러움은 무엇에 연연할 것인가.
장경루(藏經樓)에는 도장경(道藏經)이 보관되어 있고, 바람과 비를 가리는 큰 소나무가 있다.
구천궁(九天宮)은 능운각(凌雲閣)에 연결되고, 구불구불 뻗어 나가 나무 용을 바라본다.
간동(澗東) 자곡(紫峪)에는 영지(靈芝)가 아름답고, 암서(岩西) 유적에는 푸른 눈이 덮여 있다.
석지도(石脂圖)는 빛이 눈부시고, 옥꽃과 요초(瑤草)와 약초가 무성하다.
옛날 순임금께서 하늘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니, 봉황이 날아와 봉황봉 앞에 떨어졌다.
내가 보니 석굴은 거처하기 어려운 곳인데, 어찌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가는가?
제나라 동쪽의 시골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고, 몸을 일으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보라.
산 밖에서 산을 보고 누각 밖에서 누각을 보니, 고개를 들고 하늘 밖을 바라보니 얼마나 아득한가.
눈으로 열두 주를 다 굽어보고, 귀로는 솔바람 소리를 끊임없이 듣는다.
전각의 비석을 읽고 나니 눈이 활짝 뜨이고, 선계의 집에서 도사를 찾아간다.
선인의 동굴에서 북두칠성을 내려다보고, 거문고와 바둑판이 있는 곳에서 한가로이 지낸다.
옛날 왕자의 바둑 두는 모습과 종자의 거문고 타는 소리는 보이지 않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금닭이 높이 울며 긴 노래를 흐르게 하고, 옥양은 꾸짖으며 고개를 흔든다.(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닭 울음소리 같고, 또한 돌이 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한 골짜기가 신비롭고 깊숙한 곳으로 통하는데, 약탕과 거북은 아직 남아 있다.
위로는 우공의 굴이 한 줄기 숨은 도랑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태원의 보물 샘의 근원으로 통한다.
아, 지금 내가 신선과 기개가 같구나.
잠시 멈춰 서서 깊이 생각하니, 갑자기 항천의 여덟 경치가 보인다.
멀리 맑은 구름은 비단처럼 희미하고, 달빛이 신선한 시내에 비치고 둥근 우물이 있다.
쌓인 눈은 하얗게 제룡산에 덮여 있고, 천풍은 솔숲에서 윙윙거리며 분다.
찬물은 한 줄기로 옥천을 휘감고, 금붕어 연못에는 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어디에 햇살이 저녁에 비추는가? 가을빛은 맑고 깨끗하여 백송령을 찾는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기운이 침침해지니, 아래를 보니 성은 묻히고 거북은 조용하다.
온 세상이 망망대해 같아 꿈속에 들어가니, 정신없이 뒤죽박죽되어 얼마나 불행한가.
시간이 지나니 하늘 한가운데 붉은 해가 뜨고, 온갖 음침한 기운이 다 사라진다.
저녁에 단비가 티끌을 적시니, 천지만물이 옛날처럼 새로워진다.

▲《항악방고》 머리에 앞 그림을 참조
교정: 설방
편집: 학린
작가 소개
마석진(1872—1943), 자는 팽암, 호는 국화, 산서성 혼원주 수마탄촌 사람, 광서 임인과 거인(혼원 거인 동기는 총 여섯 명, 순서대로 왕준신, 정정우, 마석진, 왕장선, 요덕후, 장봉명). 현직 선거현령, 판사, 교사, 하남번서자의국 각 위원, 여변중학당 감독, 제2사범학당 감학, 섬서성 장안심판청 추사, 산서성 태원지방심판청 민정법원장, 문희현 대리지사, 혼원중학교 교사 및 교장, 산서정치실찰소 소원, 진성현 대리지사, 지사, 침수현 지사 등을 역임하고 1925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27년, 혼원현장 이찬양은 성정부의 명을 받들어 그에게 "공재향방" 현판을 수여하여 마당 정문 위에 걸었다.
마석진은 민국 시대 혼원의 저명한 벼슬아치로,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이곡 동기의 기록인 『혼원출토고물도설』, 자신의 작품집인 『설홍집』, 『마씨족보』 등을 저술했다. 약 "77사변" 전후, 마석진은 불교에 귀의하여 오랫동안 북경불학연구원에 머물렀고, 사망하기 2년 전에야 혼원현 시내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의 저택은 문묘 뒤편 손가네 골목에 위치해 있으며, "마가 대원"이라 불리며 현재 수리되어 성급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사방에서 온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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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경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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