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원고성이 왜 "구성사가" 배치로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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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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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원고성은 후당에 건설되었으며, 그 이후 여러 왕조에 걸쳐 수축되었다. 성벽이 팔각형이고 골목길이 구불구불하여 '구성사가'라고 불린다.
혼원고성은 후당에 건설되었으며, 그 후 여러 왕조에 걸쳐 수축되었다. 성벽이 팔각형이고 골목길이 구불구불하여 '구성사가(龜城蛇街)'라고 불린다. 혼원고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건륭판 『혼원주지(渾源州志)·권2·연혁(沿革)』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 성은 주 서쪽 횡산(橫山) 왼쪽에 있었는데, 협수(峽水)가 둘러 흐르고 장마가 지면 물이 불어나 성이 수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후당 때 이곳으로 옮겨 성을 쌓았다. 지맥은 동남쪽에서 와서 솟아오르는데,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성이 그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고, 첩첩이 쌓은 성벽은 마치 책을 짊어진 모양이다.”
『혼원주지』의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며, 그 속에 담긴 중요한 정보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다.
첫째,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혼원은 서한 시대에 이미 현치(縣治)가 설치되었는데, 당시에는 알현(崞縣)이라고 불렸다. 알현 옛 성은 주지에서 말하는 옛 성으로, 주 서쪽 횡산 왼쪽에 위치해 있다. 필자가 여러 차례 현장 조사를 하고 논문으로 증명한 바에 따르면, 알현 옛 성은 현재 마장촌(麻庄村) 북쪽에 위치해 있다. 저명한 학자 요전중(姚奠中) 선생도 알현 옛 성을 조사했으며, 마장촌에 '알현고리(崞縣故里)'라는 현판을 써서 걸어 주었다.

그림 1: 알현 옛 성 위치 개략도
둘째, 주지에서 말하는 협수(峽水)는 자봉곡수(紫峰峪水)와 혼하(渾河)를 가리킨다. 알현 옛 성은 두 강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지세가 평평하여 성 건설 계획에 유리했다. 하지만 단점은 폭우가 내리면 강물이 불어나 수해를 입기 쉬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당 때 현재 위치로 옛 성을 옮겼다.
자봉곡수는 현재 단류되었고, 혼하의 물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역사 연구는 현재의 상황으로 과거를 판단할 수 없다. 혼원현은 대동분지(大同盆地) 남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그 안에서 발원하는 혼하는 상간하(桑干河)의 1급 지류이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혼하는 자주 범람했다. 예를 들어 『원사(元史)·권29·태정제(泰定帝) 1』에는 “태정 원년 5월, 대동 혼원하, 진정(眞定) 호도하(滹沱河), 섬서(陝西) 위수(渭水), 흑수(黑水), 거주(渠州) 강수가 모두 범람하여 백성들의 집과 움막을 휩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권30·태정제 2』에는 “태정 3년 가을 7월, 대동 혼원하가 범람했다.”라고, 『권50·오행(五行) 1』에는 “지원(至元) 6년 12월, 혼원현에 큰 물이 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혼하가 “백성들의 집과 움막을 휩쓸었다”는 기록은 당시 홍수의 맹렬함을 보여준다. 또한 1939년 7월, 혼원 남곡(南峪)에서 대홍수가 나서 혼원 성관(城關)의 수천 명이 갑자기 집을 잃고, 집이 모두 무너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죽고 시체조차 남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고대 혼원의 연강수량은 450~550mm 사이였을 것이며, 산림과 초원이 만나는 지역으로 호랑이와 표범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북위 황실은 여러 차례 혼원에서 사냥을 하여 호랑이 등 대형 고양잇과 동물을 사냥했다[1]. 호랑이는 전형적인 산악림 서식 동물이므로, 고대 혼원의 생태 환경은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마가 지면 옛 성의 지세가 낮아 침수되기 쉬웠을 것이다.
셋째, 고대인들은 어떻게 도시 건설을 했을까?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는 표준 계획이 있다. “장인이 나라를 건설할 때는 한 변이 9리이고, 옆에 세 개의 문을 낸다. 나라 안에는 가로와 세로로 9개의 길이 있고, 길에는 9개의 차선이 있다. 왼쪽에는 조상을 모시는 곳이 있고,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으며, 앞에는 조정이 있고 뒤에는 시장이 있다.” 네모 반듯한 바둑판 모양의 도시 건설 계획은 이상적인 도시 구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형에 맞춰야 한다. 예를 들어 육조(六朝)의 수도 건강(建康), 즉 현재의 남경은 서쪽으로는 장강(長江)이 있고, 북쪽으로는 후호(後湖, 현무호)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종산(鐘山)이 있다. 건물은 산세와 수세에 따라 지어질 수밖에 없어 불규칙적인 배치가 된다. 『세어신어(世說新語)』에는 승상 왕도(王導)가 건강을 건설할 때 “강좌(江左)의 땅은 좁고 중국과 같지 않아, 만약 길을 곧게 낸다면 한눈에 다 보일 것이므로, 구불구불하게 하여 마치 헤아릴 수 없게 만들었다”라고 하는데, 사실상 도시를 네모 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계획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혼원고성은 항산(恒山)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항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혼하가 있다. 주지에는 “지맥은 동남쪽에서 와서 솟아오르는데,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성이 그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고, 첩첩이 쌓은 성벽은 마치 책을 짊어진 모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이 어려워 일반 독자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혼원고성은 산에 기대어 지어졌고, 선조들은 수해를 피하기 위해 높은 곳에 성을 쌓았으며, 평지로 이어지려면 어느 정도 기복이 있어야 했다. 혼원고성은 동남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아 도로를 곧게 낼 수 없었으므로, 성벽도 “첩첩이 쌓은 성벽은 마치 책을 짊어진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경성과 비교하면 혼원고성도 명당이지만 규모가 작다. 남경성은 ‘용이 발톱을 박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세’라고 불리지만, 혼원고성은 그에 못 미쳐 ‘구성사가’라고 불릴 수밖에 없었다.
건축의 세 가지 요소는 실용성, 견고성, 미관이다. 혼원고성의 입지는 우선 수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형의 제약으로 인해 구성사가의 배치가 되었다. 물론 일부 문사학자들은 하늘이 상징을 내리고 성인이 그것을 따랐다고 생각하여 혼원고성의 계획은 북방의 현무(玄武)의 형상에 대응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덧붙이는 말이다.

그림 2: 『고공기』의 도성 계획도
주:[1]『위서(魏書)·권27·목의전(穆顗傳)』:
(목)한의 동생 의(顗)는 충직하고 재주와 힘이 있었다. (세조)를 따라 화룡(和龍)을 정벌하여 공이 장수들보다 뛰어났고, 사위감(司衛監)에 임명되어 용양장군(龍驤將軍)이 되었고, 장락후(長樂侯)로 진봉되었다. 세조를 따라 알산(崞山)에서 사냥을 했는데, 호랑이가 뛰쳐나오자, 의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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