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장조숭丨1919년 항악 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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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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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중국 민국 시대 문인 장조숭은 베이징을 거쳐 다퉁에서 훈위안으로 향하며 항산을 유람하였는데, 이는 그가 오악을 두루 여행한 여정의 일부였다. 여행 전 그는 먼저 지방지들을 조사하여 북악이 산서성 훈위안에 있으며 허베이성 취양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짐을 꾸려 길을 떠났고, 훈위안에서 유람하며 '항악유기'를 지었다.
편집자 주
1919년 6월, 민국 문인 장조숭은 북경을 거쳐 대동으로부터 혼원에 이르기까지 항산을 유람하였는데, 이는 그가 오악을 두루 유람한 여정의 한 고리였다. 여행에 앞서 그는 먼저 지서를 참고하여 북악이 하북 곡양이 아닌 산서 혼원에 있음을 확인한 후, 곧장 짐을 꾸려 길을 떠났고, 혼원에서 유람하며 『항악유기』를 지었다. 『항악유기』는 중화서국에서 1921년 5월에 발행한 『신유기회간』(권 제15)에 수록되었으며, 본문은 1928년 8월의 『신유기회간』 제5판에서 발췌하였다. 근대 인물들이 혼원과 항산을 유람한 유기는 본 간행물이 주목하는 중점 사항이었기에, 이 글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항악유기
장조숭|지음
(1919년)

장조숭(1867—1950)
장조숭(1867—1950) 자는 경재, 호는 경재이며 광서 합포 사람으로 전청 린생이다. 민원에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에게 초빙되어 가정교사가 되어 원가의 딸, 손자, 손녀 등 여러 사람을 가르쳤으며, 북경 세무학교 및 육군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민국 6, 7년 사이에 하남 안양으로 가서 강학하며 틈틈이 중주 고적을 찾아보고 오악을 두루 유람하며 시문을 남겼다.
민국 14년, 이제심은 덩컨(중원) 사장을 기념하고자 광주에서 중원도서관을 설립하였고, 장조숭은 준비주임과 관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연경기유』『루주성적기』『내자황군숙재육십가일탄기수언』『오악유기』『유창평명릉기』『중원도서관목록·제1기』등이 있다. 장조숭은 단행본으로 발행하는 것 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여러 종류의 서적에 수록되어 재판되면서 한때 명성을 떨쳤다.
항악유기
태산과 숭산 두 봉우리는 丙辰丁已년 가을에 이미 다 올라 보았기에 항산을 유람할 것을 생각했는데, 곡양에 있다는 말도 있고 혼원에 있다는 말도 있고, 말들이 분분했다. 乙卯년 여름, 어린아이 일원을 데리고 거용관 만리장성을 출발하여 장가구에 이르고, 서쪽으로 항산을 찾아가려 했으나 산세가 험하여 중단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보정과 정정 사이를 자주 오가면서 서쪽으로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며 항악이 있을 것이라 의심했고, 여러 토착민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정림의 『북악변』을 상고해 보니 “옛날 제왕이 봉제할 때 반드시 산꼭대기일 필요는 없었다. 상곡양에서 북악을 제사 지냈는데, 산 기슭에서 140리나 떨어져 있었다. 항산현은 300리에 걸쳐 있어 제후들을 알현할 때는 반드시 산의 남쪽 평평한 곳에서 하였지, 험하고 멀고 외딴 곳에서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곡양에 간 후에 혼원에 올라갔다.” 고정림은 곡양에 대해 “올라갔다”라고 하지 않고 “갔다”라고 하였으니, 간 곳은 봉제하는 사당이었지, 혼원의 산과 같이 올라간 곳은 아니었다.
위예계의 『곡양지·서』에도 “곡양 악묘의 제사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혼원은 항산의 꼭대기이고, 대모는 바른 가지이다. 혼원에서 기맥이 시작되어 비호를 거쳐 곡양에 이르는데, 순수할 때 이르는 곳으로, 알현하기에 편리하여 수레와 말이 험준한 골짜기에 오르내리도록 하여 백성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혼원지』에도 “항산은 주치 남쪽 30리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옥화봉에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백산에 이어지고, 동남쪽으로는 창봉령에 이어진다. 산맥은 음산에서 남쪽으로 삭평에 들어와 삭주를 거쳐 서쪽으로 꺾어 동쪽으로 구주에 이른다. 다시 숙하옥, 여월, 서애, 취미를 거쳐 주의 남쪽에서 솟아 항산이 되고, 꼭대기를 천봉령이라고 한다. 아래에 북악관을 세웠는데, 북위 태연 원년에 창건되어 당 무덕, 금 천회, 명 홍무 중에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홍치 때 유우가 옛 사당이 협소하다고 하여 중봉 남쪽에 땅을 정하여 사당과 전각을 세웠고, 옛 사당을 침궁으로 바꾸었다. 남쪽으로는 부평의 대모산과 300여 리가 되는데, 기세가 본래 연결되어 동남쪽으로 솟아 곡양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모두 고정림의 말과 일치하며, 더욱 항악의 꼭대기는 곡양이 아닌 혼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유기회간』 표지
다만 이씨 운린의 『북악유기』에는 북악이 곡양에 있다고 하였다. 보정에 가서 이미 주봉을 보았다. 곡양 악묘에 이르러 본 봉우리에 대해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것은 백석산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말대로 수십 리를 걸어 봉우리 아래에 도착하였다. 길을 따라 올라갔는데, 그다지 험하지 않았다. 십여 척을 걸어 곧 꼭대기에 이르렀고, 봉우리의 그늘에서 내려와 20여 리를 걸어 광창현 성에 도착하였다. 돌아와서 기록을 남겼는데, 스스로 항악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생각하였다.(이운린의 기록은 『고금소설정화』지리류·산수문에 실려 있다).
내가 고조우의 『방여기요』를 살펴보니, 『보정부지』를 인용하여 “당현 북쪽에서 이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항산이다.”라고 하였고, 또 『광창현지』를 인용하여 “백석산은 현치 동남쪽 20리에 있으며, 흑석산과 마주한다.”라고 하였는데, 항산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항산에는 여러 다른 이름이 있는데, 『어야』에는 “북악, 한나라 문제가 자신의 이름을 피하여 ‘상산’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백호통』에는 “북쪽은 항, 곧 상이다. 음이 끝나고 양이 시작되니, 그 길이 오래가므로 상산이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상서대전』에는 “홍산, 갈홍의 『침중서』에는 ‘태항산을 항종, 명악, 무도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수경주』에는 “원악을 음악, 자악, 당나라 원화 중에는 진악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진종의 이름을 피하여 상산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하였고, 『부평지』에는 “대모산은 항산의 산맥으로 신첨이라고도 한다. 이 외에도 란대부, 열녀궁, 화양대, 자미궁, 태을궁, 청봉도, 총원금성호지 등의 명칭이 있다.”라고 하였다. 『괄지지』에 나와 있으며, 마지막에 백석산이라는 혼칭이 있다. 지금 이씨가 올라간 백산의 꼭대기를 항악의 꼭대기라고 생각하는데, 비록 항산의 지맥이기는 하지만,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의 말에 따른 것으로 허황된 추측에 가깝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더욱 항산을 직접 찾아갈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신유기회간』 목차 페이지
기묘년 여름 6월 9일, 도에서 경수철도 아침 기차를 타고, 다시 거관 장성을 나섰다. 정오에 장가구를 지나 저녁에 대동 동화참에 도착했다. 하인 한 명과 말 두 필을 빌렸다(말 한 필당 하루에 은화 1원, 하인의 임금과 식비는 5각). 다음날 아침 하인과 함께 말을 타고 대동의 후중전 삼성을 관통하는 길을 지나갔다. 이곳은 북위의 탁발규가 도읍을 정한 곳으로, 옆에는 진북진수사 雁門道尹府가 현령으로 개편된 관청 등이 보였다. 상인과 백성이 뒤섞여 살고, 가게에는 주로 토산품이 많았다. 모피 제품의 간판은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리는 좁고 더러웠으며, 낡은 집들이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었다. 앞뒤 두 성은 점점 황폐해지는 듯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문가에 앉아 가슴을 드러내고 더위를 식히거나,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화려한 옷을 입거나, 당나귀나 말을 타고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몸짓이 가볍고 소리가 높았으며,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관청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시장과 농촌의 풍습이 모두 같았다. 남자들은 피부가 검고 광대뼈가 높았으며, 날렵하고 씩씩하며 강인한, 몽골 초원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동남문을 나서니 교외는 넓고 평평했다. 어허하를 건너니 진흙탕에 물이 고여 있었다. 비가 그치자 마른 물길이 드러났다. 날씨는 무척 더웠고, 길가에는 그늘이 거의 없었다. 사아촌 국민학교에 잠시 들렀다.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한 선생님과 함께 평평한 흙집에 모여 있었다. 작은 대 위에는 공자를 모시고, 옆에는 두 개의 흙 침대가 있었는데, 갈대 매트가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다리를 꼬고 벽을 향해 앉아, 책상 앞에 앉아 연필과 책을 놓고 선생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선생님은 한 아이에게 침대 앞 구멍에서 차를 끓여 대접하도록 했다. 석탄 연기가 스며 나와 다른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드문드문 쳐진 발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땅은 덥고 깨끗했으며, 파리나 모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다른 학교와 비교해서 어떤지 물었다. 대답은 예산이 부족해서 한 달에 10원 정도의 공금만으로 충분하며, 학생들에게 돈을 받지 않아서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신유기회간 제15권 산서 항악유기》——4
떠나 다시 길을 나섰다. 왕가장, 주가보를 지나 상간하를 건넜다. 길 따라 평야가 펼쳐지고 논밭이 가득했으며, 지나는 마을마다 옛 라마사원이 보였고, 나무는 드물었고, 연못은 거의 없었다. 깊은 우물에 의지해 가뭄을 극복한다고 들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햇볕 아래 풀을 캤다. 정오 무렵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남산 기슭 근처에서 길가 숙소에 머물렀다. 대동에서 이곳까지 약 60여 리를 걸었다. 다음날 아침 아홀산, 즉 횡산에 올랐는데, 그 안에는 대북의 통로가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옛 사람들이 판 것 같았다. 석탄 절벽은 구불구불했고, 가는 흙과 모래가 위에서 떨어져 졸졸 소리를 내며 계곡의 샘물 소리와 어울렸다. 협곡의 길은 구불구불했고, 3, 4마리의 가축이 한 수레를 끌고, 말발굽 소리를 내며 힘겹게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산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 마을이 흩어져 있었으며, 바위틈과 진흙 자국에는 푸른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약 20여 리를 걸어 산등성이에 있는 소나무 만이 있는 곳, 즉 토명 송수만에 있는 작은 가게에 잠시 머물렀다. 산 사람이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숲이 우뚝 솟아 있는 곳이 바로 항악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 익토숙에 있는 삼령재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걸어 한촌보를 지나 상교간을 건너니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아, 혼원현 성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정오의 대포 소리가 들렸다. 송수만에서 여기까지 약 40여 리를 걸었다. 남관 서씨 천경창점에 여관을 잡았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며 산 계곡물이 불어나 깊이가 수척에 달했다고 들었다. 저녁에 비가 그치고 목욕을 마친 후 달빛 아래 성으로 들어갔다. 성씨 서점에 가서 《혼원현지》와 《항산도》를 빌리려고 했지만, 없다고 했다. 혼원은 척박하고 가난하며, 산물이 적고, 석탄은 산에 많지만 가격이 싸고 운반이 불편해 팔기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풍속은 소박하고, 농사와 공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자 학교가 점점 늘고 있으며, 최근 30명 이상의 사범학교 졸업생들이 교육을 장려하여 남자 학교 못지않다. 수리 사업과 농업에 관료, 유지, 평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서점에 돌아와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관 주인 서대가 이미 등산에 필요한 물품, 예를 들어 차, 떡, 방한 의류 등을 사서 짐을 꾸려 건장한 당나귀에 싣고, 그의 동생 서계천과 함께 나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동쪽으로 협곡의 관문에 이르자, 위를 보니 절벽에 "자요천험"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석봉이 양쪽에서 끼어 하늘로 치솟아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의 층층이 쌓인 누각과 같은 형상이었다. 산기슭의 네모난 구멍은 양쪽에 나란히 있었는데, 예전에 수평으로 놓인 들보로 급류를 피하던 곳이었지만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남쪽 벽에는 현공사와 "고산앙지"라는 현판이 있고, 옆에는 이백이 쓴 "장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마치 벌집이나 제비집 같은 모습이었다. "악원문"이라고도 하는데, 양업이 삼관을 지켰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신유기회간 제15권 산서 항악유기》——5
시내를 따라 오르며 말발굽 소리와 폭포 소리가 들렸고, 석탄 광산이 계속 나타났으며, 짐을 진 짐승들이 많았다. 아침 공기는 시원했고, 면으로 만든 옷을 입어도 괜찮았다. 약 20리 정도 걸어가니 갑자기 여러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약간 넓고 열린 공간, 즉 별천지가 나타났다. 위에는 큰 현판이 있었는데, 네 글자로 "북악항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명나라 홍치 16년에 중건되었고, 유우가 글씨를 썼다. 앞에는 광서 초와 민국 6년에 관리와 유지들이 중수한 "신공익운", "병판연진"이라는 현판이 각각 하나씩 있었고, 철제와 석재로 만든 짐승상이 각각 두 개씩 있었다. 왼쪽에는 "새북 제일산"이라고 적힌 도광 연간의 《중수악묘기》가 있고, 오른쪽에는 명청 시대에 항산사에 제사를 지낸 내용이 적힌 비석들이 장엄하게 세워져 있었다. 북쪽에는 삼원궁, 라마사원, 백의암이 있었는데, 규모는 작고, 승려나 도사는 드물었다. 북쪽으로 산비탈을 오르니 가파르고 길이 비탈졌다. 앞서가는 사람은 힘겹게 걸어 올라가고, 말은 힘차게 올라갔다. 타고 있는 말이 북쪽 지방의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 협곡을 지날 때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비로소 놀랍고 기쁘게 되었고, 이것은 보통 말로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4, 5리 정도 올라가니 정지령에 있는 용신사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운로초보"라고 불리는 곳이며, 옆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꼭대기를 바라보니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는데, 태산 정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고, 마치 늙은 소나무처럼 보였다.
3리 정도 더 올라가면 취운정에 이른다. 동쪽에는 망선령이 있고, 그 옆에는 집선동이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북동쪽에는 가정제가 찾았다는 자지곡이 있다. 장마철에는 습하고 더위에 곰팡이가 피고, 뱀과 전갈이 있으므로 독초를 채취할 수 없다. 곡 앞에는 자연적으로 계단처럼 된 바위가 있는데, 옷을 털고 쉬는 곳이라고 한다. 남서쪽 깊은 바위에는 오색 무늬의 석유가 있는데, 질감이 부드럽고 맛이 좋으며, 단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작은 조각을 주워 보관했다. 1리 정도 더 올라가니 북쪽에 바위에 큰 "항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서쪽으로 수십 미터 가면 암자 앞에 호풍구정이 있고, 그 옆에 "개석비"가 있다. 길이 더욱 험해지고, 약 2리 정도 올라가면 토지사와 순양궁이 있고, 가까이에 여신당이 있어 말을 쉬었다. 10여 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능운각을 지나 북악사에 이른다. 정원의 전액에는 악신을 모시고 있고, 두 개의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강희제가 쓴 "화수유구"이고, 하나는 광서제가 쓴 "삭야표기"이다. 바깥 현판은 "남천문"이라고 되어 있고, 좌우에는 명청 시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낸 내용이 적힌 비석이 29개 있었으며, 서쪽에는 어비정루가 있었다.

《신유기회간 제15권 산서 항악유기》——6
산봉우리 뒤 낭떠러지에는 “회선부(會仙府)”와 “천하명산(天下名山)”, “절지통천(絕地通天)”, “웅수령산(雄秀靈山)” 등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서쪽으로는 남쪽을 향해 사악을 바라보는 당이 있으며, 벽에는 여러 수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건륭 연간의 수주(秀水) 주휴도(朱休度)의 백량체(栢梁體) 한 편이 매우 경쾌하고 시원하다. 다시 비탈길을 오르면 약 반 리쯤 가서 서쪽 꼭대기의 금기대(琴棋臺)에 이르는데, 거기에 “오도유적(悟道遺蹟)” 네 글자가 새겨져 있고, 잔해가 쓸쓸하며, 옆을 가볍게 두드리면 맑고 우렁찬 소리가 나는 듯하다. 과로령(果老嶺)을 지나면 당나귀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쪽 꼭대기에 이르러 대무산전(大茂山殿)을 바라보니, 비석에는 “순(舜)이 순시(巡狩)하던 중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멀리서 제사를 지냈는데, 돌이 앞으로 떨어지자 안왕석(安王石)이라 이름 지었다. 다시 순시하던 중 그 돌이 곡양(曲陽)으로 날아가자 그 자리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곡양지(曲陽志)』에 기록된 돌이 날아와 사당을 세운 기록과 같다. 다만 『곡양지』의 “제사문(祭祀門)”에는 또 “당나라 정관 연간에 돌이 서쪽으로 떨어지자 사당을 짓고 멀리서 제사를 지냈는데, 처음에는 북악부군(北岳府君)이라 하였고, 개원 15년에 안왕(安王)으로 봉해졌다.”라고 되어 있어 다소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돌이 날아와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다소 허황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다만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니, 산과 강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는데, 마치 여러 제후들이 중앙 정부를 호위하는 모습과 같다. 조우(喬宇)의 『등북악기(登北岳記)』에 “동쪽은 어양(漁陽) 상곡(上谷)이고, 서쪽은 대동(大同) 남쪽이며, 봉우리가 굽이쳐 뻗어 있고, 북쪽은 운중(雲中)의 경치가 끝없이 펼쳐지며, 남쪽으로는 오대산(五臺山)이 멀리 200리 밖에 희미하게 보인다. 푸른 병풍 같은 다섯 봉우리와 비단처럼 아름다운 용봉산 등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등을 구부리고 있다.”라는 말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옛날 조씨(趙氏)가 부적을 숨겨 태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며, 나는 지난해 태산과 숭산(嵩山)의 꼭대기에 올랐던 것을 떠올린다. 지금 항산 꼭대기에 있으니, 무휼대(毋恤臺) 앞에서 나의 작은 도장을 절벽에 숨겨두고, 산신령에게 정성껏 기도하여 북방에 영원히 봉안한다.”}, {
산꼭대기의 흙은 비옥하고, 산사람들은 험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위 절벽과 구덩이 밖에 보리, 조, 약초, 과일 등을 가득 심어 산기슭까지 퍼져 있는데, 이것은 관자(管子)가 말한 “항산의 오곡이 번성하고, 네 번 심어 다섯 번 수확한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이것은 또 태산과 숭산에는 없는 것이다. 이날은 구름이 끼고 더위가 물러가고, 오후에는 바람이 점점 차가워져 두꺼운 옷을 입었다. “인천북주(人天北柱)” 비석에 이르러 청나라 초 장숭덕(張崇德)의 병렬체(駢體) 천자시(千言詩) 비석을 보니, 오른쪽에는 두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추절 구름 맑고 달빛 둥글어, 산꼭대기 선대(仙台)에서 밤새도록 바라본다.
옥루(瓊樓)와 옥우(玉宇)가 아니라면, 세상에 이런 한랭함이 어디 있으랴.
건륭 정미년 중추절 북악사(北岳祠)에 참배하고 금기대(琴棋臺)에 올라 달을 보며 짓다.
광동(廣東) 봉민창(馮敏昌)이 써서 붙이다.

『신유기회간(新遊記彙刊) 제15권 산서(山西) 항악유기(恒岳遊記)』——칠
나는 마음속으로 숙연히 경의를 표한다. 우리 고을 봉어산(馮魚山) 선생의 유작을 기쁘게 여겨, 그 아래에 두 줄의 글자를 새겼다.“민국 8년 여름 망일(望日), 광동 장조숭(張肇崧)이 북악사(北岳祠)에 참배하고, 시를 지어 비석에 새기다.” 여기에 기념으로 남기고, 정성을 다해 돌에 새겼는데, 약 두 시간 만에 대략 새기고, 종이에 여러 장 찍었다. 마침 돌 사이에 아름다운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신초(神草) 19종”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한 움큼을 채취하고, 소나무 뿌리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절벽 사이를 쳐다보니,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얽히고설켜 꿈틀거리는 듯한데, 여러 해 동안 이런 모습으로 있어 왔다고 전해져 “사조룡(四爪龍)”이라 부른다. 도사가 숭령관(崇靈官)으로 돌아와 차를 마시고 소박한 음식을 먹고, 침대에는 늑대 가죽을 깔아 나를 편히 쉬게 했다. 약 한 시간쯤 자고 나니 기분이 좋다. 동쪽으로 백운령혈동(白雲靈穴洞)을 지나 통원곡(通元谷)에 이르니, 벽에는 “과로선적(果老仙蹟)”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형기임(邢其任)이 쓴 것이다. 장과(張果)가 단약을 지은 곳으로, 당나라 때 “통원선생(通元先生)”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옆에는 비석굴이 있는데, 굴 모양이 크고 우렁차며, 아마도 파다가 무너진 것이지 신이 멀리 가져간 것이 아니다. 굴 옆에는 환원동(還元洞)이 있는데, 구멍이 깊고 어둡고, 한때 닫았다가 다시 열었는데, 황응곤(黃應坤)이 비석에 기록을 남겼다. 앞에는 천보전(天寶殿)이 있고, 동쪽으로는 포괄적인 경치를 바라보는 정자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푸른 소나무 숲을 지나 이일천정(履一泉亭)에 이르니, 샘물 맛이 맑고 달콤한데, 당나라 개원 초에 용천상관(龍泉上觀)을 지은 곳으로, 『여지람(輿地覽)』에 나오는 “태원천(太元泉)”이다. 옆에는 승지(乘之)가 은밀히 수행하던 곳이 있는데, 시와 서문도 좋다. 백호봉(白虎峰)과 석양암(夕陽岩)을 바라보니, 안개 자국이 푸르게 쌓여 있고, 이미 다섯 시가 되었다. 도사가 목장 두 개를 선물로 주었는데, 두 갈래로 나뉘어 곧게 뻗어 있고, 줄기가 약간 구부러져 있고, 모두 복과 장수를 기원하며, 나는 기쁘게 받았다. 산기슭에 이르러 말을 타고 계곡을 나와 달빛 아래 혼원(渾源) 성 남쪽 서점(徐店)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하인을 거느리고 130여 리를 말을 타고 가서 저녁에 대동(大同) 잔에 도착했다. 14일 아침에 경수(京綏) 기차를 타고 다시 팔달령(八達嶺), 만리장성, 구용관(居庸關) 등의 터널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와 저녁에 경서(京西) 직문(直門)에 도착하여 환성철도(環城鐵道) 열차를 타고 동총포(東總布) 후동 주거로 돌아갔다.
『신유기회간(新遊記彙刊) 제15권』에 게재
민국 17년 8월 제5판
교정: 설방(雪芳)
편집: 형학린(邢學琳)
키워드:
산 경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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