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장위조丨1918년 《항산》 화보
게시 시간:
2025-03-18 12:50
출처:
1918년 9월, 북양 정부 교육부 참사 장위조는 교육부의 명령을 받들어 산서 학무를 시찰하고, 편의상 오대산과 항산을 참배하였다. 9월 21일 베이징을 출발하여 먼저 기차를 타고 석가장에 간 후 태원으로 갔다. 다시 마차를 타고 오대산과 항산에 간 후, 10월 13일 대동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편집자주
1918년 9월, 북양정부 교육부 참사 장위교는 교육부 명령을 받들어 산서성 학무를 시찰하고, 마침내 오대산과 항악을 참배하였다. 9월 21일 베이징을 출발하여 먼저 기차를 타고 석가장에 도착한 후 태원으로 향했다. 그 후 교차를 타고 오대산과 항산으로 이동하였으며, 10월 13일에는 대동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10월 10일, 장위교는 훈원현 지사 과군길인(수겸)의 주선으로 현 권학소 소장 한군상오(상경), 현 시학 원군영기(죽림)와 함께 가마를 타고 항산에 올랐으며, 과지사는 요리사에게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여 하루 동안 유람하며 20여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이는 항악의 경관을 이미지로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하이 상무인서관에서는 珂羅版으로 정교하게 인쇄한 『중국명승』사진 화보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계 명사들이 여행 중 특별히 촬영한 사진들로 전국 24곳의 명산 명승지를 모아 제작된 것이었는데, 장위교의 『항산』은 중국명승 제12종으로 선정되어 1919년 7월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항산』화보는 대양 1원에 책정되었고, 길이 27cm, 너비 19cm였으며, 머릿말에는 『항산弁言』과 『여행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총 24장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으며, 항산의 주요 명소, 주요 사찰 및 도관을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다. 화보의 모든 설명문은 중국어와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국내 독자뿐 아니라 당시 이미 중국 명승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개념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근대 인물들의 훈원과 항산 여행은 본 간행물이 주목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지금 이 화보 전문을 게재하여 독자 여러분께 제공한다.

『항산』화보
장위교 | 글

장위교 (1872—1958)
장위교 (1872—1958), 자는 죽장, 호는 인시자, 강소성 무진 출신으로, 수재 출신이며 근대 저명한 교육가, 철학가, 불교학자, 건강법 전문가이다. 1902년 채원배를 만나 애국 교육 운동을 함께 전개했으며, 중국교육회 감찰, 애국학사 교원, 애국여학 사무, 교원, 교장, 상무인서관 초등학교 교과서 편집 등을 역임했다. 상무인서관 근무 시절인 1905년부터 초등 사범 강습소, 상공소학교, 상업 보습학교, 노동자 야학 등을 설립 및 주관하였다.
민국 성립 후, 채원배가 난징과 베이징에서 국민정부 교육총장을 역임했고, 장위교도 교육부 장관, 교육부 참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직무를 떠났던 기간도 있었으나 교육 활동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1922년 7월, 장위교는 강소성 교육청 청장을 역임하였고, 1925년에는 동남대학교 교장, 1927년에는 사임 후 뤄양에 거주하였다. 1929년 9월부터 상하이 광화대학교에 초빙되어 20년 동안 철학과 교수, 중문과 교수 및 주임, 문과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8년 8월에는 상하이 정풍문학원 원장을 겸임하였고, 1941년 7월부터 상하이 홍영국서관 부관장, 관장, 명예관장을 겸임하였다. 1946년 9월에는 상하이 인문월간지사 사장을 겸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특별 대표로서 소남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주석단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3월 16일 상하이에서 서거하였다.
장위교의 저술 『인시자정좌법』시리즈, 『학교관리법』, 『심리학강의』, 『중국근3백년철학사』, 『여씨춘추휘요』, 『중국불교사』, 『불학개론』, 『불교천측』, 『불학강요』, 『대승광오은론주』, 『중국교육회의 회고』등과 양대응과 공저한 『중국철학사강요』, 『송명리학강요』등이 있다. 그중 『중국불교사』는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중국 불교사 연구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항산弁言
항산은 산서성 훈원현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옛날에는 천자가 12개월 동안 북쪽을 순시하며 북악, 즉 북산에 이르렀다. 산은 북쪽 변방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태원에서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평형관이나 연문관을 지나야 했는데, 길이 험하여 10일이나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경수 철도의 교통 덕분에 베이징에서 출발하면 3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북쪽의 산은 대부분 웅장하지만 기품이 부족한데, 항산만은 수려하고 빼어나 산으로서 불릴 만하다. 나는 올해 산서성에서 교육을 조사하는 김에 태원, 신현, 정양, 오대, 훈원, 대동 각 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오대산을 참배하고 항악을 참배하였다. 당시는 양력 10월이었고, 산에는 이미 눈이 가득 쌓여 있었으며, 관문 안팎의 기후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 20여 장의 사진을 촬영하여 대강 정리하여 珂羅版으로 인쇄하고 설명을 덧붙였으며, 여정과 식사, 숙박에 관한 내용도 포함시켰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민국 7년 12월 장위교

항산牟言, 여행수지
여행수지
베이징 서직문에서 경수 자동차를 타고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대동에 도착한다. 3등석 요금은 5원 6각이며, 2등석은 2배, 1등석은 4배이다. 서직문에서 대동 역까지는 672리이다.
대동 역 근처에는 동화, 태안 등의 신식 여관이 있으며, 모두 매우 깨끗하고 음식도 맛있다. 1등실 숙박비는 하루 1원, 2등실은 5각이며, 여관에서 차와 말을 대여해준다.
대동에서 훈원현까지는 120리이며, 노새 수레 또는 교차(갈대발을 엮어 만든 것으로, 내륙의 가마와 비슷하며, 앞뒤로 두 마리의 노새에 매달아 타고 산길을 이동할 때 진동을 덜 느낄 수 있다)를 이용할 수 있다. 노새 수레 요금은 하루 약 2원, 교차 요금은 하루 약 4원이다.
대동에서 출발하여 하루 60리를 가면 길가장에 장성 여관이 있다. 이곳은 대동과 훈원의 경계 지역이다. 10리를 더 들어가면 훈원 경계에 오성구가 있는데, 대흥 여관이 있으며, 비교적 깨끗하고 숙박이 가능하며, 1인당 숙박비와 식비는 하루 300문이다. 진북 각 현 주민들은 찐 보리와 감자를 먹는데, 우리는 익숙하지 않으므로 쌀과 통조림 음식을 직접 가져가서 여관에서 죽을 끓여 먹는 것이 좋다. 길가장이나 오성구에서 출발하여 하루 60리 또는 50리를 가면 훈원현에 도착한다. 현 남문 밖에 여관이 있지만, 그다지 깨끗하지 않으며, 하루 숙박비와 식비는 수백 문 정도이다.
항산은 봉우리가 하나뿐이라 대략 한 바퀴 둘러보는 데 하루면 충분하다. 산기슭에서 산 중턱까지는 흙길로 매우 평평하다. 산 중턱에서 산신각까지는 돌길이 다소 가파르지만 계단이 잘 정돈되어 있어 걷기가 어렵지 않다. 만약 산신각 뒤편에서 정상에 오르려면 절벽과 험준한 산세, 무성한 덤불과 막힌 길 때문에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도착할 수 없다.
북쪽의 기후는 춥고 혹독하여 음력 8월이면 눈이 내리고 이듬해 3, 4월까지 녹지 않으므로 항산을 여행하기에는 여름이 가장 좋다.
항산 산신각에는 도사 한 명만 있고 매우 황량하지만, 건물은 지방의 공금으로 수시로 보수되기 때문에 아직도 웅장하다. 전각 옆에는 방이 몇 칸 있어 여행객이 숙박할 수 있지만 이불과 음식은 직접 준비해야 한다.

여행수지
중국 명승 제12종
항산 목차
1. 현공사
2. 항산 정문
3. 항산 전경
4. 정자령 아래 마을
5. 차목령 적설
6. 호풍구
7. 산신각 정문
8. 산신 침전
9. 갈아입는 집
10. 잠룡이수
11. 산신각 정전
12. 어비정
13. 옥황각
14. 회선부
15. 항산 정상
16. 정상에서 바라본 백룡동
17. 백호봉
18. 백호봉 앞 숲
19. 금기대 조망
20. 순양궁
21. 릉운각
22. 낭낭묘
23. 관제묘
24. 산신각 보인 측면 및 정면

중국 명승 제12종 항산 목차
(1) 현공사

사찰은 혼원현 남쪽 항산 아래 자기가마 협곡에 있다. 두 벼랑이 깎아지르고 시내가 흐르는데, 서쪽 벼랑 중간에 벽에 기대어 바위를 깎아 1층 건물을 지었고, 위험한 사다리와 좁은 계단, 난간이 있는 누각이 서로 연결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공중에 매달린 것 같아 그렇게 이름 지었다. 사찰 안에는 순양궁과 미륵전이 있는데, 선과 불이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후위 시대에 건립되었다.
(2) 항산 정문

현공사를 지나 협곡을 따라 약 1리쯤 가면, 시내 동쪽에 세 개의 문이 있는데, 현판에는 북악 항산 네 글자가 적혀 있으며, 이곳이 항산 산신각의 산문이다.
(3) 항산 전경

항산은 태산과 비슷하여 봉우리가 하나뿐이지만 푸르고 아름다운 경치가 빼어나다. 산문 동쪽으로 올라가면 길이 모두 평평하고, 약 1리쯤 가서 북쪽으로 돌아서면 산 전체의 경치를 볼 수 있다. 산꼭대기 사찰은 산세에 맞춰 건축되어 가지런하고 아름답다.
(4) 정자령 아래 마을

산 중턱 정자령 아래에는 주민 수십 가구가 거주하며 흙으로 담을 쌓고 띠로 지붕을 이은 집들이 고대의 분위기를 풍긴다.
(5) 차목령 적설

산 중턱 남서쪽을 바라보면 산맥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큰 것을 차목령이라고 한다. 봉우리에는 눈이 매우 두껍게 쌓여 맑은 날 햇빛에 비추이면 매우 아름답다. 양력 10월 국경일이 음력 9월 초순이다.
(6) 호풍구

산 중턱부터는 길이 점점 험해지고 절벽이 솟아오르는데, 길 중간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현판에 호풍구라고 적혀 있다. 옆에는 늙은 소나무가 우뚝 서 있다.
(7) 산신각 정문

호풍구에서 산신각까지 돌길이 가파르고 약 3리쯤 가면 북악묘가 있다. 그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장엄하며 현판에는 영전삭방 네 글자가 적혀 있다.
(8) 산신 침전

홍살문 동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절벽 중간에 산신 침전이 있는데, 삼면이 바위로 덮여 매우 아늑하고 아름답다.
(9) 갈아입는 집

산신각은 산세에 따라 비스듬히 굽어 올라가고, 산신각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이 전각이 있는데, 아직 온전하다.
(10) 잠룡이수

또 전각 왼쪽에는 두 개의 샘이 있는데, 하나는 쓴맛이 나고 하나는 단맛이 나며, 쓴맛이 나는 샘은 이미 사라졌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잠룡이수라고 이름 지었다. 여름 초에 이곳에 와서 비를 빌었다.
(11) 산신각 정전

갈아입는 집 옆으로 다시 올라가면 산길이 가파르고 험해 말이나 수레가 갈 수 없으며, 약 반 리쯤 가면 산신각 정전이 있다. 절벽 위에 있는데, 아래에는 103개의 돌계단이 있고, 정전 앞에는 남천문 세 글자가 적혀 있다.
(12) 어패정

정전 서쪽으로 절벽을 따라 올라가면 어패정이 있는데, 정자는 팔각형이고, 안에는 청나라 강희제의 어패가 있는데, 화수유구 네 글자가 적혀 있다.
(13) 옥황각

어패정 서쪽에는 옥황각이 있는데,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안에는 모두 옥황상제의 형상이 있다.
(14) 회선부

옥황각 서쪽에는 바위굴 아래에 전각이 하나 있는데, 전각 안에는 여러 신들의 형상이 있고, 전각 뒤편 바위에는 회선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15) 항산 정상

악전(岳殿) 동쪽에는 샛길이 있어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험준하여 계단이 없고,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며, 풀과 덤불이 옷을 찌른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힘껏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다. 산 아래는 바로 혼원(渾源) 성이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땅 위에 작은 원을 그린 것 같다. 산기슭에서 정상까지 높이 측정기를 이용해 측정한 결과, 해발 2080척(尺), 营造尺(營造尺)로는 6500척이었다.
사진 속 정상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세 사람은 저자인 장위조(蔣維喬)와 당시 혼원 권학소(勸學所) 소장 한상오(韓相五), 그리고 현 시학 원영기(原映淇)일 것이다. 장 선생은 『유기(遊記)』에서 이렇게 적었다. 항산(恒山)을 유람할 때 “권학소 소장 한 군(君)과 시학 원 군(君)도 함께 머물렀다.” 。
(16)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백룡동(白龍洞)

산 아래에 백룡동이 있다. 이것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17) 백호봉(白虎峰)

봉우리는 악묘(岳廟) 동쪽에 있으며, 기암괴석이 매우 아름답다. 봉우리 아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동굴이 있는데, 위쪽에는 ‘백운령혈(白雲靈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18) 백호봉 앞 숲

백호봉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무성하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마늘처럼 푸르게 보이지만, 숲 아래에 가보면 모두 껴안을 만큼 크고 하늘에 닿을 듯하며, 기묘한 바위들과 어울린다.
(19) 금기대(琴棋臺)에서 바라본 풍경

대는 회선부(會仙府) 서쪽에 있으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늘어서 있고, 한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옆에는 돌 의자가 있다. 이것은 산 아래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20) 순양궁(純陽宮)

궁은 회선부 서쪽에 있으며, 안에는 여조상(呂祖像)이 모셔져 있다.
(21) 릉운각(凌雲閣)

각은 순양궁 서쪽에 있으며, 뒤에는 위험한 절벽에 기대어 우뚝 솟아 있어 릉운이라고 이름 붙였다.
(22) 낭낭묘(娘娘廟)

묘도 순양궁 서쪽에 있으며, 네 모서리가 높이 솟은 것은 종루(鐘樓)이고, 모셔진 것은 송자손낭낭(送子孫娘娘)이며,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 유래한 것이다.
(23) 관제묘(關帝廟)

악묘 서쪽에 있으며, 뒤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고, 앞에는 무성한 숲이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
(24) 악제보인(岳帝寶印) 측면과 정면

인장은 구리로 만들어졌고, 주위에는 24개의 금별이 있다. 인장면 중앙에도 금이 박혀 있으며, 거북이 손잡이와 용 머리, 용꼬리, 용발톱이 있다. 인장 글씨는 세 줄로 되어 있으며, ‘북악항산안천존원성제보(北岳恒山安天尊元聖帝寶)’ 12자가 새겨져 있다. 이 인장은 전청(前清) 시대에 대동부(大同府) 소속 각 주현(州縣)이 매년 번갈아 관리했고, 현재는 혼원현 지사(知事)가 보관하고 있다.

중화민국 8년 7월 초판, 18년 5월 3판.
『중국명승 제12종—항산(恒山)』, 각 권 정가는 대양(大洋) 1원이며, 외국은 운임과 송금 수수료를 추가한다.
편찬자: 장위조(蔣維喬)
발행 겸 인쇄자: 상해 보산로(寶山路)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발행소: 상해 및 각지 상무인서관
중국 명승 사진은 이미 22종이 출판되었으며, 모두 우리나라 교육계 명사들이 여행 중 특별히 촬영한 사진으로, 콜로타입(珂羅版)으로 정교하게 인쇄되었다. 각 권에는 20~30장의 명산승수(名山勝水) 사진이 있으며, 책상 위에 두고 감상하면 마치 천연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다.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히 추천한다.
『중국명승』(출판 화첩): 1. 황산(黃山), 2. 려산(廬山), 3. 보타산(普陀山), 4. 서호(西湖), 5. 피서산장(避暑山莊), 6. 태산(泰山), 7. 형산(衡山), 8. 공림(孔林), 9. 우산(虞山), 10. 안탕산(雁蕩山), 11. 천대산(天台山), 12. 항산(恒山), 13. 오대산(五臺山), 14. 서산(西山), 15. 반산(盤山), 16. 대방산(大房山), 17. 화산(華山), 18. 무이산(武夷山), 19. 천목산(天目山), 20. 운대산(雲台山), 21. 목간산(莫干山), 22. 노산(勞山)
문자 정리: 경지용(靖志勇)
도판 스캔: 동영강(佟永江)
교정: 설방(雪芳)
편집: 형학린(邢學琳)
키워드:
산 경관 지역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